1
대학 재학 시절,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항공 프로젝트였는데 유독 영어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었다. 해외 여러 업체에 전화를 걸어 정보를 확인하고, 의중을 떠보고, 담당자를 구슬려야 했다. 콜드콜이었다. 상대는 누군지도 모르는 동양인 인턴의 전화를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순토종으로 태어나 영어 쓸 일이 거의 없던 나였다. 수화기를 들 때마다 심장이 뛰었고, 문장은 머릿속에서 조립되다 무너졌다. 제대로 말아먹었다. 우여곡절 끝에 팀에서 추방당했다.
(다행히 다른 팀에서 구제를 받았고, 그때 형들과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뵙고 지낸다.)
2
그 압박과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우여곡절 끝에 노르웨이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원래 덕후였던 나는 일본으로 건너가려다 노르웨이로 변경했다. 영어를 많이 쓸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나를 떠밀고 싶었다. 그때 학교와 첫 자매결연을 맺은 곳이라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고 (몰랐고), 학점도 토플도 낮은 내가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운이 좋았다.
그곳에서 1년, 좌충우돌하며 지냈다. 문법은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입은 트였다. 친구들과 놀고, 사주 봐주고, 술 먹고, 여행 다니며 영어가 한결 편해졌다. 잘하진 못했지만 편했다. 그것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3
그래도 서툴렀다. 우연히 프레지라는 회사에 면접 기회가 생겼을 때, 영어로 본격적으로 일할 자신이 없어 부랴부랴 과외를 받았다. 그렇게라도 외운 문장으로 겨우 면접을 넘겼다.
운좋게 오퍼를 받고 일을 시작했을 땐, 매번 회의 발표 내용을 통째로 외워서 발표했다. 즉흥적으로 답할 자신이 없으니 대본을 짜고 리허설을 했다. 4년 동안 매주 있던 위클리는 내게 전쟁이었다. 처음 1년간은 발표 전날 긴장해서 잠도 제대로 못잤다. 꾸역꾸역 외우고 내뱉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영어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4
라인에서는 네이티브가 아닌 여러 나라 사람들과 영어로 일했다. 일본, 태국, 대만 사람들과 소통했는데, 다들 서로 완벽하지 않은 영어를 주고받았다. 이상하게도 그게 더 편했다. 어떻게 일했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기억도 안 난다.
출장이 하도 잦아 실려가듯 그곳에 가 주고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정리하고 다시 건너가고- 보따리상처럼 일했다. 손짓발짓, 엉성한 발음과 구성으로도 일은 어떻게든 굴러갔다. 완벽한 문장보다 끝까지 밀어붙이는 태도가 더 필요했던 시기였다.
5
10월에 미국에 건너가 정신없이 영어로 생활하고 일해야 한다. 겁이 덜컥 났다. 제법 나이도 찰만큼 찬 지금인데, 영어 앞에서는 여전히 그 인턴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뭐, 또 어떻게든 되겠지.
동선형 소개로 김한울 선생님에게 꾸역꾸역 영어 수업을 받고 있다. 원만하게 다녀오기 위한 보험을 든 셈인데, 모쪼록 이 보험이 잘 작동하길 부지런히 성실히 소화하고 있다.
6
오늘 현석이형을 만났다. 내가 처음 영어를 못해 팀에서 쫓겨날 때 같이 인턴했던 형이다. 비틀거릴때 내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던 형이었는데, 그 얼굴을 보자마자 그때 기억이 모락모락 샘솟았다.
그 형은 인턴을 끝내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찌보면 국내에서 레버리지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내려놓고, 미국에서 맨땅에서 시작한 형이 늘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때도 영어를 멋지게 잘하던 형이 내게 늘 우상같았다.)
20여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영어의 저주에 갇혀있구나. 그 와중에 우여곡절 끝에 영어를 제법 해야 선발되는 프로그램에 뽑히기도 했으니, 나름 내가 기특하기도 했다. (잘한다는 게 아니라, 20년전보다 조금 더 할 줄 안다는 것이다.)
평생 투자해야 하듯,
영어도 평생 공부해야겠지.
더디게 실력이 늘어도,
견디는 태도는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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